군사

나치 독일의 전쟁 돌입의 역사와 미치광이 히틀러의 썩은 야망

오델리아 2017. 5. 9. 16:12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거울의 방은 "평화의 사이"아 "전쟁의 사이"를 연결하는 구조의 회랑이며, 또한 과거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의 임시 조약 체졀과 독일 제국의 성립이 선언 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독일 국민의 대부분은, 독일의 영광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가 베를린 중앙 정부의 저자세 외교의 "배신"에 의해 손실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 독일의 영토 상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강화 조약 인 베르사유 조약으로, 영토의 일부를 잃게 되었다.


- 1923년 11월 뮌헨 폭동

방청권은 서로 쟁취하기 위해 외국 특파원 백명 이상이 모였다. 그만큼 재판은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히틀러가 대폭 감형 된 것은 여론과 공산주의의 신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애국 무죄"론의 분위기 때문.



히틀러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이 재판을 홍보에 이용, 게다가 8개월여 만에 임시 출옥. 봉기 이후 나치는 불법화되어 있었지만, 1925년에 당은 재건되었다.




- 1929년의 세계 공황

"암흑의 목요일" 길거리에 사람들이 모이고...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폭락하고 세계 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미국에서만 6천여개의 은행이 도산하고, 최악일 때의 1933년에는 실업률이 24.9%, 실업자는 1200만명, 4명중 1명에 달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고 있던 미국 경제가 파탄 된 것은 필연적으로 세계 경제를 파탄시키게 되었다.


1929년 10월 대공황이 시작되자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의해 지원되어 오던 독일 경제는 곧 파산했다. 국내 수요는 극단적으로 감소하고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입은 떨어졌다.


- 히틀러의 대두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잘했다는. 그것은 연설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상당히 적합했었던 성격이었다는 것.



히틀러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매우 결함이 있었던 것은 유명하다. 젊은 시절 부터 멀티적으로 담소는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뿐이었다는.


지방의 강연회에서 수십 명 규모의 작은 집단을 상대로 자주 연설했던 것을 기회로, 아무래도 연설에 상당히 능숙했다는...그래서 나치당에서 서서히 유명세를 타고 출세가도를 달림.


- 1939년 8월 23일 독일 소련 불가침 조약

그리고...1939년 바로 풀란드를 침공.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


폴란드 침공은 1939년 9월 1일에, 독일군과 독일과 동맹 한 슬로바키아의 군부대가 9월 17일 소련군이 폴란드 영내에 무력 침공 한 것을 가리킨다.


전격전의 포인트는, 적의 전선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아군의 공격을 집중시키고, 전차 장갑차 등의 자동화 된 부대로 돌파, 적진 깊숙히 침투.


독일 공군은 1776기를 투입 해 고성능 폭탄 560톤, 소이탄 72톤을 투하하고 바르샤바를 분쇄.




-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기습 공격 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전차의 개량을 동결하고, 전차의 대량 생산으로 키를 돌렸다.


- 독소전에 의한 대폭적인 손해


<1941년 가을, 러시아 전선의 진흙탕에 빠진 위생 트럭을 견인하고 있는 제30 보병 사단 소속의 T26 경전자>


독일군의 손해는 이미 투입 병력의 35%, 100만명 및, 그리고 올해 만 전사자는 20만명에 달했다. 국방군의 지도부는 모스크바에서 전면 철수를 주장.


생산 능력의 한계로 광대한 전선에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광대한 토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고, 도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도로는 비포장이었고, 독일군의 전진을 막는데에 일조한 것은 질흙탕 인 뻘밭이었다.



-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성공했을 때,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고, 측근의 군사 고문에게 진주만이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질문. 그러나 누구도 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독일에서도, 연합국측으로부터도 잘 보이지 않는 숨겨진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강제 수용소의 많은 곳에서는, 강제 노동, 학살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가장 잔혹했었다.



공개 처형의 모습

공개 처형된 시체앞에서 오른쪽 여성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이 후 이 모든 사람들은 공개처형....


-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었던 친위대와 SS 여성보조부


- 이르마 그레제(1923-1945)

이르마 그레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베르겐 베루젠 수용소의 SS 여성 교도관이었으며, 가장 사나운 여성 교도관으로 모두들 두려워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