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강인한 전사 스파르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오델리아 2018. 5. 16. 11:06

고대 그리스 시대의 "스파르타"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로 명성을 떨쳤던 도시 국가이다.


국가는 전사의 힘을 신뢰 한 나머지, 성벽 등은 필요없다는 듯이 제거해 버렸다. 알렉산더 대왕이 제압하지 못했던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도시들과 다른 국가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엄격하고 가혹한 군사 교육 제도가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태어난 소년은 수많은 시련을 거쳐 전사로 길러진다. 그들의 양친은 어머니가 아니라 국가였다. 그 교육법은 스파르타 교육의 이름으로 지금도 알려져있다.


■ 약한 아기는 방치되어 죽는다


스파르타에서는 약한 아기는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몸이 약하거나 질병이나 기형이있는 아이는 그대로 방치되어 죽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먼저 신체 검사를 하고, 허약하거나 이상이 있거나 하면, 아버지는 "Apothetae"라는 구멍에 넣어버린다고.... 거기에 담긴 아이는 그대로 굶어 죽게된다는.


■ 7살 때부터 막사에서 생활


7살이 된 소년은 스파르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부모와 떨어져 소년 감독관이라 부르는 교사로부터 배우게된다. 그 생활은 무척 가혹한데, 아이들은 서로 집단 괴롭힘이나 도발에 싸우고, 무조건 싸우는 것을 권장하게 된다는... 여기에서는 평화가 유지되는 장소가 아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면, 소년 감독관은 주먹으로 결판을 내라고 한다.




■ 먹을 것을 훔치라고 교육받는다


스파르타 교육 중에는 생활 필수품 등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신발은 사치품으로 간주, 맨발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된다. 배가고프면 훔치라고 하고, 최소한의 양의 식사만 하도록 강요. 도둑질에 성공하면 그걸로 끝. 그러나 들키면? 상상에 맡기겠다.


■ 굶주린 아이들에게 치즈를 놓고 대결


매년 축제도 고단한 것이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단에 치즈가 바쳐지고, 소년은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격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 축제에서는 목숨을 잃는 살마도 있었다고 할 정도다. 소년은 항상 용맹스러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으며, 미소를 띄우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 음식은 최악


스파르타의 식사는 5성급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요리와는 정반대. 어쨌든 스파르타 병과 식사를 한 이태리 출신의 남자가 "스파르타 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고 소감을 토로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다. 그만큼 맛이 없었고, 뭔가 더 먹고 싶다면, 스스로 사냥을 해서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 스파르타 교육 이외의 교육은 금지


스파르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전사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상인과 농민이 아닌 전사 인 것이다. 그들은 싸우는 방법을 배웠고, 터프함이 필요했다. 또한 필요가 있을 시에 한하여, 문자도 배웠다. 그 이외 스파르타 교육에서 벗어난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과외 교육은 위험한 사치로 간주되었으며, 뺄셈과 덧셈을 배우거나 철학적 수수께끼를 고찰하는 것등은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 사람 앞에서 매질하는 축제


스파르타는 채찍질(Diamastigosis)라는 가혹한 축제가 있었다. 소년은 관중의 앞에서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마치 고문 같지만, 스파르타 인들에게는 명예였다. 자진해서 재빨리 자신이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 군사 훈련으로 노예를 죽였다


스파르타에게는 Helot이라는 팔레스타인의 노예가 있었다. 그 취급은 심했고, 크립테이아(Krypteia)라는 군사 훈련에서는, 노예들을 풀어놓고,소년들은 그들을 공격해 목숨을 빼앗았다는.... 스파르타의 소년들은 단검과 음식이 주어졌고,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죽일 것을 강요당한다. 밤이 될 때까지 매복하고는 그곳을 지나던 노예와 일하는 노예를 습격했다.


■ 전장에서 죽은 병사에게만 묘비를 세울 수 있다


늙어 죽은 스파르타 인은 존중받을 수 없다. 평탄하게 끝난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묘비도 없다. 묘비를 얻기 위해서는 싸움에서 죽는 것이다. 전투 중에 죽은 스파르타 인의 시체는 그 자리에 묻혔고, 존중의 증거로서 그 이름과 전사했다는 것을 묘비에 새겨진다.


특이한 점은, 여성의 경우 출산하다가 죽으면 전사자와 같은 존중을 받고 묘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